예수님의 사역과 말씀(1)<주의 사랑>

2019. 1. 18. 08:54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천국 복음/하나님을 아는 길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주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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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2. 주의 사랑

(마 22:37~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구절에서 하나는 용서를 이야기하고 하나는 사랑을 이야기했다. 이 두 방면의 내용은 은혜시대에 예수가 할 사역의 내용을 아주 두드러지게 언급한 것이다.

하나님이 성육신 될 때는 거기에 따라 한 단계 사역을 가져오고, 그 시대에 발표할 성품과 구체적인 사역 항목을 가져온다. 그 시기에 인자는 하나님이 그 시대에서 할 역사 범위를 중심으로 사역하고, 더 많이 하지도 않고 적게 하지도 않는다. 인자가 하는 말씀마다, 하는 사역마다 모두 그 시대와 관련된다. 인자가 사람의 방식과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든 아니면 신성의 언어로 표현하든, 어떤 방식과 어떤 각도이든, 그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인자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 다른 각도로 사람에게 자신의 뜻을 깨닫고 알고 이해하게 하며, 사람을 구원하는 자신의 사역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다시피, 은혜시대에 예수는 사람에게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문제를 대부분 인성의 언어로 표현했고, 동시에 더 많은 경우에는 평범한 길잡이의 각도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 역사 방식은 은혜시대 이전의 율법시대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과 더 가까워졌고, 사람들을 더 많이 체휼해 주었기 때문에, 형식과 방식에서 더욱 실제적인 효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는 비유가 그 점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 중의 숫자로 도달하려고 하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그 말씀에서 예수가 그때 그 비유를 하게 된 뜻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목적은 사람에게 한두 번이 아니고 일곱 번도 아닌,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남을 용서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의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는 어떤 개념일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남을 용서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과 자신의 필수 과제로 삼고 또한 ‘도(道)’로 삼아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비록 비유에 지나지 않지만 화룡점정의 역할을 했다. 그것은 사람에게 예수의 뜻을 깊이 깨닫게 해 주었고, 그 말씀에서 자신이 실행해야 할 길도 얻게 해 주었으며, 실행의 원칙과 기준도 얻게 해 주었다. 그 비유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 수 있게 해 주었고, 정확한 개념도 가지게 해 주었다. 즉,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양해해 주고 관용해 줄 수 있는 그런 심리 상태를 가지고, 조건도 없이 횟수 제한도 없이 용서해 줄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 말씀을 하는 동시에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정말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하는 것만 생각했을까?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용서하는 일에 횟수가 있느냐? 많은 사람들은 여기에 있는 ‘횟수’에 대해 매우 흥미를 느끼며 그 횟수의 출처와 거기에 담긴 뜻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예수가 왜 그런 숫자를 말씀했는지 알고 싶어 하면서 그 숫자에 꼭 어떤 더 깊은 함의가 있을 거라고 여긴다. 사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인성에서 말씀한 비유일 뿐이다. 그 어떤 메시지나 함의가 들어 있는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을 향한 예수의 요구에서 떠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성육신하지 않았을 때, 사람은 하나님이 했던 많은 말씀들을 깨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말씀들은 완전한 신성에서 오고, 그 말씀을 했던 각도와 배경은 사람이 볼 수도 닿을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이 볼 수 없는 영계에서 발표해 낸 것이고, 육체 가운데서 살고 있는 사람이 꿰뚫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육신한 후, 인성의 각도에 서서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기에 영계의 범위를 벗어났고 초월했다. 하나님은 사람의 관념 속에서 상상한 것이나 사람의 생활 속에서 볼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일들이나 혹은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과 사람이 깨달을 수 있는 말이나 인류가 장악하고 있는 지식으로 신성에 가지고 있는 자신의 성품과 뜻 그리고 자신의 태도를 표현하여,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정도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알아가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요구 기준을 이해하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이다. 비록 하나님이 육신에서 역사하는 방식과 원칙은 인성에 의하거나 인성을 통해(원문: 透過) 더욱 많이 도달하지만, 오히려 신성이 직접 역사하여 도달할 수 없는 효과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이 인성에서 역사하는 내용은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진실하고 더욱 핵심적이며, 방식상에서도 융통성이 많아졌고, 형식상에서도 율법시대를 초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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