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역과 말씀(2)<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듣다>

2019. 1. 19. 10:41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천국 복음/하나님을 아는 길

예수가 표적과 기사를 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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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요한복음 6:8~13)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우리 먼저 첫 번째 구절을 보자. ‘예수가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어떤 개념이냐? 통상적으로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면 몇 명이 먹을 수 있느냐? 일반인의 식사량으로 가늠한다면 겨우 두 명만 먹을 수 있다. 이것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사람에게 주는 최소한의 개념이다. 하지만 이 구절에 기록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몇 명에게 나누어 주었느냐?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비하면 오천 명이란 그 수는 많지 않으냐? 그 수가 많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사람이 보기에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 간에 차이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한입씩 조금만 먹는다고 해도, 그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오천 명이 먹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다. 그는 오천 명을 모두 배불리 먹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은 것도 있었다. 성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표적은 사람에게 예수의 신분과 지위를 보게 했고 또한 하나님에게는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며, 하나님은 전능하다는 사실도 보게 해 주었다. 여기에서는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는데, 음식물이 없었다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을까? 당연히 먹일 수 있다! 그것은 표적과 기사이기 때문에 사람이 불가사의하다고 여기고, 기묘하여 헤아릴 수 없다고 여기는 부분이 무조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 하나님에게는 보통 일인데 왜 여기에서 설명하려고 할까? 왜냐하면 그 표적의 뒤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한 예수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

비록 떡과 고기를 먹은 오천 명은 예수를 따를 생각이 없었지만, 예수는 그 사람들과 따지지 않았다. 너희는 그 사람들이 배불리 먹은 후에,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느냐? 예수가 그들에게 그 어떤 말씀이라도 가르쳤느냐? 그 일이 있은 후, 예수는 어디로 갔느냐? 성경에는 예수가 그들에게 어떤 말씀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예수는 표적과 기사를 행한 후, 그곳을 조용히 떠났다. 그럼 예수가 그 사람들에게 어떤 요구라도 했었느냐? 증오가 있었느냐? 그런 것은 다 없었다. 예수는 그저 자신을 전혀 따르지 않을 그 사람들을 더 많이 상대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때, 예수의 마음은 아팠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인류의 타락을 보았고, 인류가 자신을 저버리는 것도 느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그 사람들을 보고 있거나 혹은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인류의 아둔과 무지에 예수의 마음은 매우 괴로웠고 또 매우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되도록 빨리 그 사람들을 떠나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주님의 마음속에는 그 사람들에게 그 어떤 요구도 없었고,

그 사람들을 상대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그 사람들에게 심혈을 쏟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한 그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지라도 그들을 대하는 예수의 태도는 여전히 매우 분명했는데, 예수는 단지 그들을 선대하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려고만 했을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재 아래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이다. 즉, 모든 피조물에게 선대해 주고 공급해 주고, 그들을 적셔 주고 키워 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이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 자신의 실질을 유로하였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즉, 인자한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대하였고 그 사람들을 선대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보든, 어떤 결과가 있든, 예수는 오직 조물주의 신분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대해 주었다. 예수에게서 유로된 것 중에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예수는 조용히 일을 한 후, 또 조용히 떠났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떤 면의 성품일까? 하나님의 자비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하나님을 무사(無私)한 분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틀림없이 하지 못한다! 실질상으로 놓고 말하면, 예수가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인 그 오천 명은 어떤 사람들이냐? 주님과 마음이 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느냐? 다 하나님과 적대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확실히 말해서, 그들은 절대로 주님과 마음이 합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또한 그들의 실질은 틀림없이 하나님과 적대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느냐? 예수는 한 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적대를 풀어 주었다. 그 방식이 바로 ‘선대’이다. 다시 말해, 예수가 그들을 죄인으로 여겼을지라도 하나님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피조물이었으므로, 예수는 여전히 그 죄인들을 선대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관용이다. 그 관용은 하나님 자신의 신분과 실질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어떤 피조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태도를 참으로 느낄 수 있을 때,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정’과 염려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너는 조물주가 자신이 만든 모든 피조된 인류에게 기울인 심혈과 쏟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두 단어로 묘사할 것이다. 어떤 두 단어일까? 어떤 사람은 무사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박애(博愛)라고 말한다. 그 두 단어 중에서 ‘박애’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기에 가장 부적합한 단어이다. 그 단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의 넓은 흉금과 마음을 묘사하는 데에 쓴다. 나는 그 단어를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칙도 대상도 가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베푼다는 뜻이 있고, 우매한 사람, 흐리멍덩한 사람의 감정이 흘러넘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런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뜻이 있다. 내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할 더 적절한 단어가 두 개 있는데, 어떤 단어일까? 첫 번째 단어는 ‘석대무비(碩大無比)’이다. 이 단어는 예술적인 경지가 있지 않느냐? 두 번째 단어는 ‘광대’(원문: 浩瀚)이다. 내가 이 두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은 그 속에 실제적인 의의가 있다. ‘석대무비’란 이 단어는 글자 그대로 보면 어떤 실물의 부피나 용량을 묘사하는 것 같지만, 그 실물이 얼마나 크든 그것은 사람에게 만질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그것은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정확하고 실제적인 개념을 주기 때문이다. 평면적인 각도에서 보든 아니면 입체적인 각도에서 보든, 그것은 모두 그 존재를 가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면 비록 사람에게 그 단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했다고 느끼게 하겠지만, 그와 동시에 또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정량화하기 힘들다는 것도 느끼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량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공허한 것이 아니고, 전설 속에서 생긴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만물이 함께 누리는 것이고, 또한 모든 피조물이 각기 다른 정도로, 서로 다른 각도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에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하지만 오히려 만물이 자양을 얻고 성장하도록 하는데, 만물의 성장이 하나님 사랑의 세부적인 것을 창현(彰顯)하고 있으며, 또한 시시각각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고 있고 증거하고 있다. 정량화하기 어렵다고 한 것은 하나님이 만물에게 공급하고 만물을 자양하는 비밀은 인류가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이 만물을 대하고 특히 하나님이 인류를 대하는 마음은 사람이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조물주가 인류에게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자신이 친히 만든 인류에 대한 조물주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그 정은 얼마나 큰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아무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석대무비’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목적은 사람이 드넓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 실제 존재를 체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사람이 ‘조물주’란 이 몇 글자의 실제 함의를 더 깊이 깨닫고, ‘피조물’이란 이 호칭의 진정한 의의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광대하다’란 단어로는 보통 무엇을 묘사하느냐? 그것은 보통 바다나 우주를 묘사할 때 쓰인다. 예를 들면, 광대한 우주, 광대한 바다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드넓고 심오하고 고요한 우주는 아무도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그것에 대해 상상과 경앙(敬仰)으로 가득하고, 그것의 비밀과 심오함에 대해 바라볼 수는 있으나 닿기는 어렵다. 바다를 생각하면 바다가 광활한 것부터 떠오를 것이다. 바다는 그 끝을 볼 수 없게 하고 또한 그 신비함과 너그러움을 느끼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광대하다’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데, 그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 사랑의 귀중함과 하나님 사랑의 심오함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하나님 사랑의 에너지는 무한하고 광활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며 또한 하나님 사랑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사랑에서 유로되는 하나님의 존엄과 범접할 수 없음도 느끼게 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너희는 내가 ‘광대하다’란 단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느껴지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석대무비’와 ‘광대하다’라는 이 두 단어를 능히 감당할 수 있을까?

위의 첫 번째 표적과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실질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비록 사람이 수천 년 동안 읽어 온 이야기이고, 이야기 속에서 일부 간단한 줄거리를 제시하여 간단한 현상들을 보게 했지만, 우리는 그런 간단한 줄거리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소유소시이다. 이런 소유소시는 하나님 자신을 대표하며,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발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을 발표할 때, 자신의 마음의 소리도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만족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가 한 그런 일들이 바로 하나님의 소리 없는 표현인 것이다.감당하기에 충족하다! 인류의 언어에서 이 두 단어만이 비교적 적절하고, 하나님 사랑에 대한 묘사에 비교적 가깝다. 너희는 적절하다고 느껴지느냐?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이 두 단어를 쓸 수 있느냐? 너희는 틀림없이 쓸 줄 모를 것이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너희의 이해와 체험이 단지 평면적인 범위에만 국한되어 있고, 아직 입체 공간의 높이에는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라고 하면 너희는 말문이 막히고 심지어 할 말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오늘 말한 이 두 단어는 아마 너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전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것은 단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체험하고 이해한 것이 너무 얕고, 범위가 너무 작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내가 전에 하나님은 무사한 분이라고 하니, 너희는 무사하다는 것만 기억했구나. 설마 하나님의 사랑을 ‘무사’로밖에 묘사할 수 없단 말이냐? 그 범위는 너무 협소한 것이 아니냐? 이 일에서 너희는 많이 상고해야만 어느 정도 수확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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